1. 박완서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못 가본 길에 대한 새삼스러운 미련은 노망인가, 집념인가. 올해가 또 경인년이기 때문인가, 5월이란 계절 탓인가, 6월이 또 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팔십을 코압에 둔 늙은이다.
 그 두 개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뿐이다.

 

2. 김훈 - 푸른 날치 떼 등에서 햇빛이 <흑산>
 초여름에는 날치 떼가 바다 위를 날았다. 날치는 꼬리로 수면을 때리면서 몸을 공중에 띄우고 가슴지느러미를 날개처럼 펼쳐서 물 위를 날아갔다. 수천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면 대열을 이룬 푸른 등에서 햇빛이 물결로 일렁거렸다.
 날치의 무리가 안갯속을 날아갈 때는 새들이 물속을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날치는 어른 키보다 높이 떠서 수십 걸음을 날아갔다. 한 무리가 날아가다가 물 위에 내려앉으면 다른 무리가 솟구쳐 올랐다. 날치 떼는 긴 물결무늬를 이루며 바다를 건너갔다.

 

3. 김애란 - 종이 비늘 다린 물고기 되어 <종이 물고기>
 그는 포스트잇들이 거대한 담쟁이덩굴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혹은 소나무 껍질 같기도 했고, 물고기 비늘같이 도 느껴졌다. 방은 촘촘한 비늘에 덮인 어떤 생명체 같았다. 비늘이 붙어있지 않은 창문과 방문은 그 생명의 어떤 기관처럼 느껴졌다.
 그는 겨우내 닫아두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중략) 그럴 때면 다섯 개의 벽면에 붙은 포스트잇들은 일제히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자 그것은 더욱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방 전체가 하나의 종이 비늘이 달린 물고기가 되어 부드럽게 세상을 헤엄쳐 다니는 상상을 했다.
 그는 물고기의 지느러미 옆에 붙어 있는 듯한 기분도 느꼈고, 반대로 자신이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느꼈다.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포스트잇을 붙이고 나면 물고기가 싱싱한 등허리를 파닥거리며 자신을 데리고 어딘가로 헤엄쳐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4. 무라카미 하루키 - 과거는 앨범 속에서 수정된 채 <양을 둘러싼 모험>
 공기는 어딘지 모르게 쩌릿해져 있었고, 조금 힘을 주어 걷어차기라도 하면, 대개의 것들은 싱겁게 무너져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나와 그녀가 함께 찍은 것은, 그녀의 부분만이 정확히 도려내어져, 나만이 남겨져 있었다. 나 혼자 찍은 사진과 풍경이나 동물을 찍은 사진은 그대로였다. 그러한 세 권의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완벽하게 수정된 과거였다.
 눈동자는 자세히 보니 신비한 꽃을 띠고 있었다. 갈색이 감도는 검정에 파란색이 아주 조금 들어 있고, 오른쪽과 왼쪽이 들어가 있는 정도가 달랐다. 마치 오른쪽과 왼쪽에서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한 눈동자였다.

 

5. 헤르타 뮐러 - 바람조차 허기를 먹여 키웠다 <숨그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배고픔이 담겨 있었다. 모든 대상이 길이, 넓이, 높이, 색깔 면에서 내 배고픔의 외연이 되었다. 하늘이라는 이불과 땅과 먼지 사이 모든 장소가 각기 다른 음식 냄새를 풍겼다.
 수용소 부지는 캐러멜, 수용소 입구는 갓 구운 빵, 수용소를 가로질러 공장으로 항하는 길은 따뜻한 살구, 공장의 나무 울타리는 설탕 입힌 견과... 잡초 속의 송진 덩어리에서는 설탕에 절인 모과 냄새가, 코크스 가마에서는 멜론 냄새가 났다. 그것은 마법인 동시에 고통이었다. 바람조차 허기를 먹여 키웠다.

 

6. 미시마 유키오 - 금각사는 거대한 닻에 잠긴 듯 <금각사>
 내 가슴은 마구 설레었다. 이제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보게 되는 것이다. 해는 기울기 시작하고 안개에 묻혀 있었다. 연못을 사이로 건너편에는 긴카쿠가 저물어 가는 해 앞에 정면으로 서 있었다.
 나는 가느다란 난간에 기댄 채 우두커니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못은 석양빛을 받고 녹슨 옛날의 동경 같은 거울에 긴카쿠의 그림자를 수직으로 떨구고 있었다. 물풀과 마름이 떠 있는 저 아래쪽으로 서녘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은 우리들 머리 위에 있는 하늘과 달랐다. 그건 맑고도 고요한 빛으로 충만해 있었고, 밑에서부터 혹은 안쪽에서부터 이 지상 세계를 감싸 안은 듯했다. 긴카쿠는 그 속에 검게 녹슨 거대한 순금 닻처럼 잠겨 있었다.

 

7. 장석주 - 봄 마당 꽃들의 출석부 들고 <만보객 책 속을 거닐다>
 눈 녹은 자리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 복수초다. 금단추 같은 복수초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면 그 옆에서 노루귀가 분홍 꽃을 피운다. 복수초보다 먼저 흑을 뚫고 싹을 내미는 것은 상사 초고, 그다음이 수선화다. 그 뒤로 산수유, 목련, 매화, 살구, 자두, 앵두, 조팝나무 등이 차례로 꽃을 피우고, 그 아래 제비꽃, 민들레, 은방울꽃이 핀다.
 해마다 봄마당에서 꽃들의 출석부를 들고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는 것은 그것들이 '살아 있는 기쁨을 느끼고 나누고 싶은 생명 본연의 원초적인 활력'을 주는 까닭이다.

 

8. 카뮈 - 봄은 헤아릴 수 없는 밀물이다 <작가 수첩 1>
 파리의 봄 : 하나의 약속 혹은 마로니에 잎의 새싹 하나, 그로 인해 비틀거리는 마음, 알제에서는 그 변화가 더 갑작스럽다. 그냥 장미꽃 봉오리 하나가 아니다. 어느 날 아침 숨이 컥 막히도록 맺힌 수천 개의 장미꽃 봉오리다.
 우리의 가슴을 스쳐 지나가는 어떤 섬세한 종류의 감동이 아니라 수천 가지 향기와 수천 가지 눈부신 색깔들의 어마어마하고 헤아릴 수 없는 밀물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어떤 감성이 아니라 그야말로 육체가 공격을 당하는 것이다.

 

9. 귀스타브 플로베르 - 관능의 질감에 기뻐하는 그 손 <보바리 부인>
 신부는 종부 성사를 시작했다. 먼저, 지상의 모든 영화를 그토록 탐내던 양쪽 눈 위에, 다음에는 훈훈한 미풍과 사랑의 향기에 욕심내던 코에, 이어 거짓말을 하고 또 오만 때문에 신음하고 욕정에 소리를 내지르던 그 입에, 동시에 관능의 질감에 기뻐하던 그 손에, 그리고 마지막에는 발바닥에, 옛날의 그녀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두를 때는 그토록 날렵했건만 이제 다시는 걷지 못할 양쪽 발바닥에 도유식을 했다.

 

10. 김택근 - 문장은 언제나 시퍼렇게 살아 <경향신문 '여적'>
 작가 최명희. 그는 생전에 단 하나의 소설에 매달렸다. 너무나 곱고 맑고 슬프기에 대하 예술 소설이라 이름 붙은 <혼불>이 그것이다. <혼불>을 읽으면 아프다. 작가의 온몸을 돌아 나온 문장은 언제 읽어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귀기가 느껴진다. 사금파리에 베인 듯, 꾹 누르면 핏물이 나올 것 같다.
 동천에서 한기가 쏟아지고, 팍팍한 황톳길이 아득히 펼쳐지고, 처연한 노을 자락이 들과 마을과 삶을 덮는다. <혼불>은 일제시대 남원지방을 배경으로 종가를 지키는 여인 3대의 삶을 추적했다. 그의 글쓰기는 실로 무서웠다. 사람들은 그를 신들린 작가라 했다. 그 정치함, 그 치열함, 그 준열함에 몸을 떨었다.

 

<출처: 글쓰기 - 어떻게 쓸 것인가>